영화 펄프 픽션 (로튼토마토 92%) - 다시 봐도 짜릿한 클래식
세 가지 사건이 엮인 기묘한 하룻밤
동네 어귀에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서 주인 아저씨의 추천으로 이 테이프를 빌려오던 날이 아직도 선명해요. 집으로 돌아와 낡은 비디오 데크에 '철컥' 소리를 내며 테이프를 밀어 넣었을 때, 저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를 기대했었죠. 하지만 화면에 펼쳐진 세계는 무척이나 낯설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는 마치 제멋대로 찢긴 잡지 페이지처럼 순서 없이 흩어져 있었거든요. 킬러 빈센트가 보스의 아내인 미아를 돌보며 겪는 아찔한 데이트, 승부 조작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복서 부치의 사투, 그리고 뜬금없이 식당에서 권총을 빼 드는 강도 커플까지. 타란티노는 이 어수선한 파편들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나로 엮어냅니다. 사실 내용은 뒷골목 양아치들의 시시콜콜한 소동극일 뿐이지만, 그들이 쿼터 파운더 치즈 버거의 프랑스식 명칭을 두고 나누는 수다를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 묘한 리듬감에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 미아의 멈춘 심장을 살리려 가슴에 아드레날린 주사를 꽂던 그 찰나의 긴장감은, 수십 번을 다시 본 지금도 여전히 제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곤 하네요.
저예산의 기적과 타란티노의 천재성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감독의 지독한 뚝심과 우연이 겹친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당시 주류 영화계에서 잊혀 가던 존 트라볼타를 주연으로 세우기 위해, 신예였던 타일러는 제작사를 향해 끈질긴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잭 래빗 슬림 식당에서 보여준 그 나른하면서도 위트 있는 트위스트 댄스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아 본인의 실제 애마였던 1964년형 쉐보레 말리부를 촬영장에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참 인간적입니다. 심지어 그 차가 촬영 중에 도난당했다가 20년 만에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이 영화 자체가 현실에서도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죠. 800만 달러라는 소박한 자본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고 독립영화의 신화를 쓴 배경에는, 소품 하나하나에 묻어있는 감독의 지독한 영화적 결벽증과 애정이 녹아있습니다. 이런 비화를 알고 나면 화면 속 낡은 자동차 시트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시대를 앞서간 B급 감성의 세련된 변주
어느덧 40대 중반, 삶의 굴곡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지금 다시 본 <펄프 픽션>은 20대 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 시절엔 그저 '세련됐다', '멋있다'는 감탄사가 전부였다면, 이제는 이들이 나누는 쓸데없는 대화 속에서 인생의 날것의 무엇인가를 발견합니다. 우리 삶도 거창한 사건보다는 사실 무의미한 수다와 예기치 못한 우연들로 채워져 있잖아요. 로튼토마토 지수 92%라는 숫자가 무색할 만큼, 이 영화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독보적인 질감을 가졌습니다. 세련된 올드 팝 사운드트랙이 흐르고 미아가 쉐이크를 들이켜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낡은 극장 좌석에 앉아 있던 어린 날의 제가 떠올라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느껴지는 그 묘한 해방감은 일상에 지친 저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발칙한 상상력,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미까지. 여전히 저에게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위로입니다.
